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처드 3세 (문단 편집) == 즉위 이전 == [[1452년]] [[10월 2일]] 포더링헤이(Fotheringhay) 성에서 [[요크의 리처드]]와 세실리 네빌의 13남매 중 12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웬즐리데일에 있는 미들햄(Middleham) 성에서 보냈는데, 그 성은 사촌형이기도 한 워릭 백작 '[[킹메이커]]' 리처드 네빌의 소유였다. 그곳에서 리처드는 워릭의 딸들 이사벨과 앤, 그리고 워릭의 피후견인 프랜시스 러블과 친하게 지냈고 이후 그 친구 관계는 평생 동안 이어졌다. 하지만 [[1460년]]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아버지와 둘째 형 에드먼드가 죽자 어머니가 바로 윗형 [[조지 플랜태저넷|조지]]와 함께 [[저지대 국가]]들로 보내어 1년간 피난 생활을 했다. 그 뒤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에드워드 4세]]로 즉위한 큰형으로부터 글로스터 공작위를 받았다. 다만 아직 [[나이]]가 어려 어린 시절 살던 미들햄 성으로 보내져 12살까지 [[기사]] 훈련을 받았다. [[사춘기]]를 겪는 동안 리처드는 선천성 [[척추측만증]]으로 고통받았다는 것이 유골 검사 결과 밝혀졌다. 그리고 이 시기에 사생아 2명(내지 3명)을 낳았는데 그들의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에드워드 4세와 그의 옹립공신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Richard Neville)은 [[엘리자베스 우드빌]]과의 결혼을 계기로 반목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에드워드 4세가 엘리자베스 우드빌이 왕비가 되기엔 [[신분]]이 낮았는데도[* 정확히는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아버지 리처드 우드빌이 베드퍼드 공작 [[랭커스터의 존]]의 시종무관이었고 기사계급 출신이었다. 특히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어머니인 룩셈부르크의 자퀘타(Jacquetta of Luxembourg)는 [[신성 로마 제국]]의 통치 가문이던 룩셈부르크 방계 출신의 고위 귀족으로, [[헨리 6세]]의 숙부인 베드퍼드 공작 존과 결혼하기도 했다. 하지만 불과 2년만에 베드퍼드 공작이 사망하면서 자퀘타는 [[과부]]가 되었고 시조카 [[헨리 6세]]의 명으로 잉글랜드로 돌아오던 중 전남편의 시종 무관이었던 리처드 우드빌과 [[사랑]]에 빠져 국왕의 허락도 없이 [[귀천상혼]]으로 결혼했다. 하지만 자퀘타가 헨리 6세와 그의 왕비인 [[앙주의 마르그리트|앙주의 마거릿]] 모두와 인척 관계였던 점 덕분에 그들의 [[결혼]]은 정식으로 인정받았고, 리처드 우드빌은 [[세습]] 귀족인 리버스 남작(이후 백작으로 승격된다) [[작위]]까지 받게 되었다. 즉, 완전히 농부나 하층민 집안 출신은 아니였지만 [[에드워드 3세]]의 혈통을 물려받은 다른 잉글랜드의 귀족들에 비해 신분이 낮은 건 확실했다.] 그녀의 미모와 [[재산]]에 혹해 즉흥적으로 비밀 결혼을 했기 때문이였다. 당연히 대부분의 귀족들은 물론 [[추밀원]]까지도 엘리자베스 우드빌과의 결혼에 반대했고 [[여론]]도 그닥 좋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프랑스]] 공주와 에드워드 4세의 결혼을 추진했다가 에드워드의 갑작스런 결혼으로 부랴부랴 혼인동맹을 수습하느라 대외적으로 [[명예]]가 크게 실추당한 워릭 백작의 불만이 가장 컸다. 게다가 엘리자베스의 첫째 남동생 앤서니는 별다른 [[능력]] 없이 오로지 [[누나]]의 후광만으로 짧은 기간에 그와 맞먹는 [[힘]]을 지녔기 때문에 워릭 백작은 개인적인 [[자존심]]까지 상처입었다. 리처드는 둘째 형인 [[조지 플랜태저넷|클래런스 공작 조지]]와 달리 에드워드 4세에게 충성했다. 클래런스 공작은 에드워드 4세가 자신이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의 맏딸 이사벨 네빌과 혼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것에 불만을 가졌고, 1469년에 이르러서는 워릭 백작과 손을 잡고 각지에서 반란을 사주하는 등 대놓고 에드워드 4세를 적대했다. 1470년 9월 워릭과 클래런스는 미리 잉글랜드 북부에서 반란을 일으켜 에드워드 4세의 관심을 돌린 뒤 잉글랜드 남부로 침공했다. 워릭의 동생 몬태규 후작 존 네빌이 결정적인 때에 에드워드를 배신하여 에드워드 4세는 동생 리처드, [[윌리엄 헤이스팅스]] 등과 함께 국외로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서둘러 [[잉글랜드]]를 빠져나오느라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못했던 에드워드 4세가 자신의 모피 외투로 뱃삯을 지불하려고 하자, 리처드가 상륙지의 토지 관리인에게 서둘러 달려가서 3파운드를 빌려와 뱃삯을 내 주었다고 한다. 에드워드와 리처드 형제는 자신들의 누이인 요크의 마거릿이 시집갔던 [[부르고뉴]]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요크의 마거릿의 [[남편]]인 부르고뉴 공 샤를(용담공 샤를)은 처남들의 망명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노발대발했지만, 나중에는 군사 1200명과 배 36척을 지급해서 에드워드 4세의 귀환을 도와주었다. [[1471년]] [[3월 11일]] 부르고뉴를 출발한 에드워드와 리처드는 요크 파에 동정적인 동앵글리아에 상륙하려 했으나 폭풍 때문에 [[3월 14일]], 홀더네스 지역에 상륙했다. 그 지역은 처음에는 그들의 진입을 거부했지만 에드워드가 '왕위가 아닌 그저 요크 공작령만 돌려받으러 왔다.'고 주장하여 겨우 문을 열어주었다.[* 헨리 4세가 예전에 썼던 그 레퍼토리다.] 형제는 조지의 지지를 되찾았고, [[1471년]] [[4월 14일]] 바넷 전투에서 리처드는 17살의 나이에 군대의 선봉에 섰다. 이 [[전투]]의 [[승리]]에 그가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논란이 있지만, 같은 해 [[5월 4일]] 튜크스베리 전투에서는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 확실하다. 리처드는 두 전투 모두에서 선봉에 섰지만, 튜크스베리 전투가 끝난 뒤에는 (이후 노퍽 공작이 되는) 존 하워드와 함께 [[포로]]로 잡힌 랭커스터 파 주요 인물들을 재판했기 때문이다. 형인 클라렌스 공작은 에드워드 4세에 반역죄로 체포되어 [[런던탑]]에 갇혔다가 처형되었는데 훗날 리처드가 [[포도주]] 통에 넣어서 살해했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에드워드 4세는 [[1472년]] 북부 지역에 대한 정부의 통치력을 높이고 경제적, 행정적으로 낙후한 북부 지역을 개발하기 위해 '북부자문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리처드에게 [[잉글랜드]] 북부의 통치권을 주어 자신의 대리로서 그곳을 다스리게 했다. 리처드는 그때부터 [[1483년]]까지 북부를 다스렸는데, [[요크]] 시를 중심으로 북부 전역에서 [[인기]]가 높았는데, 북부자문위원회의 최고 민사법원장으로 일하면서 공정한 법 집행을 했기 때문이다. 북부자문위원회는 [[요크셔]]와 북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주로 [[토지]] 분쟁을 해결하고 왕의 [[평화]]를 지켰으며 범법자를 처벌했다. 그 결과 북부의 [[치안]]은 이전에 비해 크게 좋아졌고 경제적으로도 점차 나아졌다. 하지만 [[1470년대]] 중반부터 [[스코틀랜드]]의 잦은 침입이 문제되었고, [[1480년]]에는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있었기에 전쟁을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에게 위아래에서 협공당하는 막장 [[상황]]이 도래할 것이었다. 이에 리처드는 그해 [[5월 12일]] 북부 군대 [[사령관]]이 되어 노섬벌랜드 백작과 함께 맹렬한 반격을 했고 [[11월]] 왕과 자문위원회가 공식 선전포고를 하자 본격적 공격에 돌입하... 려고 했지만 왕이 제때 [[군대]]를 이끌고 도착하지 못했고 스코틀랜드 역시 지도부의 분열로 제대로 된 공격을 할 여력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1482년]] [[8월]] 초까지 간헐적인 접전만 계속해야 했다. 8월 초, 리처드는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에 들어가 스코틀랜드 왕의 남동생 올버니 공작이 화해 조약에 서명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그 동안에도 공격을 늦추지 않아서 수백 년 동안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사이에서 주인이 바뀌어 왔던 버윅-어펀-트위드(Berwick-upon-Tweed)를 [[8월 25일]] 비로소 손에 넣었다. 리처드의 점령 이후 다시는 버윅의 주인이 바뀌는 일이 없었고, 바로 그날 [[에드워드 4세]]는 [[로마 가톨릭]] [[교황]] [[식스토 4세]]에게 리처드가 [[에든버러]]와 버윅의 시민들을 모두 살려주었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 보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